양반과 노비가 한이불 덮고 잤던 조선 시대의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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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를 손님에게 먹이는 주모가 젊다.
1900년이전에도 양반 자제들은 양주를 마셨다.

주막에서는 보통 음식값만 받고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 1 ~ 2칸의 방에 보통 10여명이 묵었다고 한다.

미국 선교사 무스 "주막안의 사람들은 상자안의 정어리처럼 포개져 있었다."

흔히 조선 시대의 주막이라 하면 술집을 떠올리지만, 사실 주막은 동네 주민들이 술을 마시거나 외식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행객이 잠시 머물며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술집보다는 여관이나 식당에 가까운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행객이 아닌 일반인이 집 밖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은 도시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 근대사회에 들어서고, 우리나라에 외식 산업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1980년대 무렵부터다.


◆ 밥 그릇 크기가 모두 예사롭지않다.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소?"

당시 사람들이 여행길에 먹고 자고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은 ‘역驛’과 ‘원院’이 있었다. 당시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역마와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서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었고,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원’이었다.

퇴계원, 혜음원, 인덕원, 다락원 등의 지명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원’은 고려 시대에 절에서 관리하던 숙박업소로, 때로는 행려병자의 치료와 빈민 구제 사업도 겸했던 다양한 목적의 시설물이었다.


◆ 1902년 주막의 멍석위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들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불교 탄압 등으로 절에서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민간인들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결국 땔나무나 마실 물 밖에 제공하지 못하는 영락한 시설물로 퇴락하고 말았다.

17세기에 박두세가 서울에 과거 보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남 아산의 요로원(要路院)이라는 곳에서 묵게 된 과객의 이야기로 소설을 썼는데, ‘원’을 아주 삭막한 곳으로 표현했다.

주인공은 침구는 물론 반찬으로 장과 소금에 절여 말린 청어도 갖고 다녀야 했고, 심지어 주막에 도착해서는 쌀을 꺼내 밥도 지었다. 방안에서 불을 밝히기 위한 관솔도 갖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원이 없으면 주막에서 자야 했는데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막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1390년에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하륜은 경주에서 울산까지 90리 길을 가는 동안 머물러 쉴 곳이 없어 맹수가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채 수풀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200년 가량 지난 16세기 말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오희문은 70일간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주막에 머문 적이 없었다. 그는 일가친척이나 평소 안면이 있는 양반의 집, 또는 그 종의 집, 일반 백성의 집을 찾아 다니며 잠자리를 해결했는데 전혀 안면이 없는 양반 집에서는 한 번도 묵은 일이 없다.

사극을 보면 양반이 길을 걷다 해가 저물면 민가 앞에서 “이리 오너라” 하여 하룻밤 재워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듯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주막

이러한 여행길의 불편함은 18세기쯤에는 교통 요충지 대로변에 주막이 생겨나고,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주막이 집단적으로 형성된 주막촌도 형성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또 해가 기울면 어두워져서 길을 갈 수도 없지만 야행성인 호랑이가 덮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나루터 주변이나 산기슭 대로변에도 주막이 들어섰다.

18세기 말에 황윤석이 전라도 흥덕현 고창의 고향집과 서울을 오르내릴 때에는 군데군데 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주막

그러나 그때에도 주막은 잠자리와 식사, 말먹이만을 해결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당시의 주막은 요즘의 여관이나 모텔처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진 곳이 아니었다.

주막은 오직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놓고 목침만을 갖추어 놓았으며 그것도 대개는 여러 명이 한 방에서 뒤엉켜 자야 했다. 침구도 스스로 마련하여야 했으므로 여행객의 짐보따리에는 온갖 옷가지, 세면용구, 비상식량에 요와 이불까지 끼어 있었다.

다만 군불만큼은 방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때어 주었다.

19세기 말, 처음 조선의 주막에 들른 영국인 지리학자 비숍(Bishop)은 호랑이의 위협 때문에 방문도 열지 못하는 방안에서 방구석에서 메주 띄우는 냄새까지 뒤섞인 40도에 가까운 열기에 잠을 설쳤으며, 몇 해 뒤에 입국한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ASON Grebst)는 조선인들은 아침이면 방에서 빵처럼 구워져 나온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소련인 카르네프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고문같았다. 한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비숍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주막의 방은 언제나 과도할 정도로 뜨거웠다. 섭씨 33도가 평균이고 그 이상도 자주 올라간다. 숨이 막혀서 문이라도 열면 호랑이가 온다고 닫게 했다.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숨을 쉴 수 밖에 없었는데 몸을 지지는듯한 40도의 온도를 조선인들은 즐기는 듯 했다."

한겨울에도 따듯한 방에는 늘 벌레들이 득실거렸다. 어떤 곳은 너무 많아 발을 디딜곳도 없었다고 한다.

밥과 여물을 늘 준비해야하는 탓에 한 여름에도 모든 방의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했고 숙박객들은 밖에 멍석을 깔고 잠을 자야 했다.


◆ 주막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길손들

조선 시대의 주막(酒幕)은 ‘술막’이라고도 했는데, 술막이라는 이름이 변해 숯막, 탄막이라고도 했고, 점막(店幕), 점사(店舍)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주막의 규모는 대부분 일반 민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쉽게 말해 지금의 민박집과 비슷했다.


초창기의 주막은 아주 소박했지만 19세기말의 주막에서는 돈을 주면 밥, 국, 김치에 각종 나물이나 미역무침, 달걀 따위를 먹을 수 있었고, 때로는 국수에 닭고기에 닭보다 싼 꿩고기를 사먹을 수도 있었다.

미국 선교사 무스 "조선의 주말에서는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따로 없었다. 김치 특유의 발효 냄새로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인 혼마 "주모가 음식을 조리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호걸이라도 수저를 드는 일에 주저할 것이다. 주모는 자기 입속에 들어간 숟가락으로 계속 간을 본다. 젓가락같은 것은 거의 씻은 적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항아리에서 김치를 꺼내 썰고 있었다."

또한 주막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람이 하룻밤 묵어가듯 말에게도 꼴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룻밤 묵고 먹는 값을 연가(煙價)라 했는데, 사람 하나의 연가와 말 한 마리의 연가가 똑같았다.

18세기 실학자 황윤석 "주막에서 잠을 자면 1인당 10푼(현 4,000원), 말 1필당 10푼이었고 식사를 하면 끼니당 40푼(16,000원), 떡은 20푼(8,000원)에 사먹을 수 있었으며 술은 1잔에 15푼(6,000원)이었지만 안주는 공짜였다. 짚신은 한짝에 50푼(20,000원), 참빗은 하나에 25푼(10,000원)이었다."

100년뒤 미국 선교사 무스 "미국돈으로 대략 10센트(약 3,000원)이면 숙박료가 포함된 저녁과 아침 식사가 가능했다. 미국에서 3달러나 받는 고급 여관을 생각하면 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에서 10센트는 최고 수준의 주막에서 쉴 수 있으며 더 허술한 주막에서는 절반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일반 노동자가 하루 꼬박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10센트였으니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으려면 하루 일당을 모두 바쳐야 한다."


◆ 문경세재 주막

여행객들에게 잠자리는 제공하지 않고 식사만 제공하는 간이 주막들도 꽤 있었다.

18세기의 김홍도나 김득신이 그린 풍속화를 보면 길가의 밥집에서 주모가 부뚜막에 솥 하나를 걸어놓고 국밥을 팔고 있다.

손님은 나무 그늘 밑 땅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밥을 먹거나 부뚜막 앞에 앉아 국과 두어 가지 찬에 밥을 먹었다.

이곳에서는 술도 함께 팔았는데 안주값을 따로 받지는 않고 술을 사면 술상에 간단한 안주가 딸려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런 주막이 간판이 있을 리 없었다. 유럽에서는 문 앞에 담쟁이 가지를 걸어 놓아 술집 간판 대용으로 썼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술 거르는 용수를 높이 걸어놓거나 ‘주(酒’) 자가 쓰인 등을 걸어 그곳이 주막이라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때로는 국수를 파는 집에서는 종이를 국수 모양으로 길게 찢어 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여행자가 여행 경비를 모두 갖고 떠나기엔 엽전 돈다발은 굉장히 무거웠고 주막에서는 여행자들의 돈을 대신 맡아주었다.


여행자는 처음 묵는 주막에 엽전 꾸러미를 맡긴 후에 영수증을 받았다.

이후 거쳐가는 주막마다 영수증을 제출하면 주막에선 여행자가 쓴 경비를 확인하여 영수증에 표기했다

여행이 끝나면 가까운 주막에 가서 영수증을 보여주고 정산 후 남은 돈을 거슬러 받았다.

이렇게 하면 돈을 모두 가지고 다니지 않고도 편리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전국 주막 주인들의 조직은 광범위하고 일원화와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막 주인이 영수증을 받지 않거나 돈을 떼어먹는 일은 없었다.

나그네들이 술 한 잔에 살아온 인생 이야기나 새로운 소식들을 풀어내면 이야기를 들은 주모가 다른 나그네에게 전달하거나 옆자리 나그네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또 은밀히 만나 통치자를 비판하는 모의와 거사를 논의하거나 유배지로 향하는 선비들이 잠시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유배 길의 애통함을 담은 정약용의 시 ‘율정별(栗亭別)’도 나주의 한 주막에서 탄생했다.

그런가 하면 탐관오리의 부패한 행적을 은밀히 조사하던 암행어사가 반드시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 조선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

암행어사는 하사된 봉서를 펼쳐봐야 자신이 감찰할 곳을 알게 되는데, 대개 생면부지의 장소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정보를 얻을 유용한 장소가 주막이었던 것.

널리 이름을 떨친 암행어사 박문수도 고을에 도는 눈물겨운 이야기와 억울한 사연을 수집하러 가장 먼저 들렀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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