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즈오카 경찰의 에이스로 불리던 형사의 몰락


일본 시즈오카 경찰의 에이스로 불리던 형사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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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레바야시 아사오 (紅林 麻雄)

1908년 ~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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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레바야시 아사오는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 태생으로

23살에 경찰에 입문 후 형사가 되었는데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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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레바야시 아사오 -

그러던 중 2차 대전시기 벌어진 한 사건이

그의 명성을 크게 높여주었는데

바로 1941년 ~ 1942년 시즈오카현에서 벌어진

- 하마마츠 사건 범인 나카무라 세이사쿠 -

하마마츠 사건은 당시 19살이었던

부농 집안 막내아들 나카무라 세이사쿠가 벌인

연쇄 강도/살인 사건으로

당시 청각 장애로 인한 컴플렉스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멸시당하던 그가 직접 만든

단검으로 9명을 살해하고, 6명에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미수에 그쳤으나 그는 강간 목적도 갖고 있었기에

주로 여성들이 살던 집을 주로 노렸다고 하며

그는 1944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작품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했다

- 하마마츠 사건 수사 당시 쿠레바야시 아사오 맨 왼쪽 -

이 때 쿠레바야시 아사오도 이 수사에 참가했는데

범인 체포에 가장 큰 제 1공로자로

1942년 11월 수사공로상을 받으며

언론에 보도되어 그는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후에 이 사건 공로 자체가 과장됐고

그가 사건 해결에 일부 기여하긴 했으나

사건 현장에서 잡은 나카무라의 몸 수색 당시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범인상이 아니라며

다른 사람의 공을 그가 지휘자로서

대신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마마츠 사건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승승장구 하며 계속 수사를 맡았는데

1948년 시즈오카 이와타 군에서

이 사건은 1948년 11월 29일 일가족 4명이

처음 실종 후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으로

이 사건도 쿠레바야시 아사오의 팀이 맡아 범인을 체포.

8명의 가족이 살던 집에서 4명이 살해당하는

이 사건 또한 아사오의 수사팀이 담당해 범인을 체포

같은 1950년 5월 10일

시즈오카 이하라구 고지마 촌의 사탕 공장에서

사장의 부인 오사와 유키가 도끼에 맞아 숨지는

이 사건도 아사오의 수사팀이 범인을 잡는다.

-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아카호리 마사오 -

이후 1954년 시즈오카 시마다 시의 한 사찰에서

유치원 졸업식이 이루어졌는데

성폭행 후 살해된 채 발견된 시마다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도 아사오의 수사팀이 출동해 해결하고 범인을 체포했다.

이렇듯 시즈오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은 쿠레바야시 아사오와 그 부하들이 해결했고

그는 최고의 경찰로 인정받고

표창만 300번을 넘게 받으며

수사의 명수라는 큰 명성을 얻게 된다.

- 1960년대 일본 최고재판소 -

그러나 이후 재판에서 그의 명성은 금이 간다

그가 체포했던 사치우라 사건의 범인 4명에 대한 재판결과

1심 사형 - 2심도 사형이 유지됐으나

3심에서 판결 파기 환송되어

1963년 4명 모두 최종 무죄 판결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1명은 무죄 판결 전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 야마자키 효하치 형사 -

뒤이어 그가 해결했던 후타마타 사건도

1심 사형 - 2심 사형 유지였으나

3심에서 판결 파기 환송 되어

1심, 2심을 거쳐

1957년 최종 무죄 판결이 나왔다.

- 야마자키 형사의 부인 야마자키 마사 오른쪽 -

참고로 이 사건에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당시 수사에 참가했던

- 야마자키 형사 가족들 -

수사 과정에 고문과 강압, 거짓 자백 유도가

있었다고 폭로했고

최종 판결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진실을 말했으나 이후 경찰에서 강제 퇴직당하고

정신 감정에서 망상성 치매라는

보복성 진단을 받았으며

그의 집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에 소실되어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관해서 변호사로 사건에 참가했던

키요세 이치로가 야마자키 형사의

야마자키 형사도 이후 1997년 자신의 책을 출간한다

덧붙여 이 후타마타 사건을 소재로 쓴 도서 중

책이 유명하다.

이어서 그가 해결했던

고지마 사건도

1심 무기징역 - 2심 무기징역 유지였다가

3심에서 판결 파기 환송으로

1959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이 나왔다.

- 1989년 재판 당시 아카호리 마사오 -

뒤이어 그가 담당했던

시마다 사건도

1심 사형 - 2심 사형 확정 에서

4차례의 재심 청구가 기각됐으나

결국 1983년 재심 결정으로 재판 진행,

1989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이 나왔다.

아카호리 마사오는 체포부터 무죄 석방까지

34년 8개월을 사형수로 장기 복역했고

2024년 94세로 사망했다

사치우라 사건부터 해서 그의 명성은 박살났고

이후 수사 방식의 실상이 드러났는데

1. 강도 높은 고문/강압 취조

2. 상황에 맞춰 증거 조작 및 은폐, 알리바이 무시

3. 무고한 사람을 특정해 범인으로 몰아 자백 유도

4. 야마자키 형사 같은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복

경찰로서 형사로서 절대 하면 안될 짓만 골라서 했으며

그의 휘하에 있던 후배 형사들도 그를 보며 배웠다고 한다.

초기 하마마츠 사건에서 진범 체포에 성공한 점이

이것은 시즈오카 경찰 상층부도 사실상 묵인 및 은폐한

조직적 행위이자 조직적 병폐였으며

그 결과물이 저 네 건의 사건이며

일본과 시즈오카 지역의 대표적인

교통 순찰대로 좌천됐으며

좌천 후에도 책임 소재와 함께 비난받으며 퇴직,

1963년 뇌출혈로 55세 사망했으며

쇼와의 고문왕 이라는 멸칭을 얻고

일본 경찰의 구조적 문제와 어둠을 상징하는

가장 큰 오점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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