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여인이었던 역사의 희생양 민갑완

황태자의 여인이었던 역사의 희생양 민갑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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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갑완의 여권 사진

민갑완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과 약혼했습니다. 민갑완과 이은은 1897년생으로 동갑이었습니다.

민갑완이 왕세자비로 간택날 그녀는 궁중에 들어가 이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됩니다.
당시에 이미 일본에 의해 조선은 좌지우지 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상태였고 순중의 이복동생인 이은이 황태자가 된 상황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본에 의해서 정해졌습니다. 민갑완은 초간택만 치뤄진 상태로 아직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황태자 이은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데리고 갑니다. 1907년 이은과 민갑완의 나이 11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은이 일본으로 떠나버린 후 궁에서 나온 문상궁(순종의 보모)이 민갑완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 상해에서 민갑완과 그녀의 동생

상황이 어려워져서 예를 갖출 수 없었지만 택일하여 신물을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약혼지환이라고 쓰여진 곽 안에는 금가락지 두짝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황태자 이은과 민갑완은 정식으로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민갑완은 그저 책을 읽으며 영친왕 이은의 귀국과 혼례를 기다렸습니다.

 


 

◆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정혼 사실을 보도한 1916년 8월 3일 자 도쿄아사히신문 지면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궁에서 제조상궁이 민갑완의 집을 찾아와 약혼 반지를 돌려달라고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에서 영친왕 이은 일본 황실의 공주 마사코와 정략결혼하게 되자 파혼을 종용당하게 된 것입니다. 민갑완의 집안에서는 반대하였고 실랑이는 보름간 지속되었습니다.

비록 단 한번 밖에 보지 못한 약혼자였지만 이렇게 파혼 당하면 민갑완은 다시 결혼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게 당시 사회상이었습니다.

 


 

◆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 일본 육군 정복을 입은 영친왕과 일본 황실 전통의상 차림의 이방자 여사

 


 

◆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

 


 

◆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 1월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총독관저 내부로 들어가는 영친왕.

영친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 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 영녕전 참배의식 중인 영친왕.

1918년 1월15일 삼전의 참배에 이어 16일에는 참배 의식 중 가장 중요했던 종묘 전알(궁궐, 종묘, 문묘, 능침 등에 참배함)이 행해졌다.

순종이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감기로 인해 영친왕 혼자 의식을 진행했다. 영친왕은 종묘 참배를 한 후 뒤에 있는 영녕전에 나아가 참배했다.

 


 

◆ 이 황실가족 사진은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 모습.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는 이 사진에 대해 모두 모여 함께 일본 요리로 식사를 한 후 찍은 사진이라고 전한다. 즉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는 가족사진인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 석조전 오찬 기념사진.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관리들과 중추원 인사들,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군인과 경찰 고위 관계자들이 참가하여 총 3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중 이 사진은 일본 인사들이 중심이 된 사진으로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인물의 면면을 보여준다.

 


 

◆ 남대문에서 동경으로 향하는 영친왕.

13일 동안의 귀국일정을 마친 영친왕이 남대문역에서 거수를 취하고 있다.

 


 

◆ 노년의 민갑완

그리고 시집 가지 못한 윗형제자매가 있으면 동생들 또한 결혼을 갈 수 없었습니다. 민갑완은 3명의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민갑완의 집안에서는 용인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조선 왕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압력에 의한 일이었기에 보름 뒤에 약혼 반지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일본 정부는 민갑완이 눈의 가시였기 때문에 결혼을 종용했습니다.

 


 

◆ 노년의 민갑완

조선인과의 재혼이 어려울 것을 알고 일본인을 적극 추천하며 결혼하게 하려고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그 후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은 술병이 났는데 내의원에서 준 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더 이상 민갑완은 조선에 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외삼촌, 동생과 함께 상해로 떠나게 됩니다.
그 뒤 계속 상해에서 지내던 민갑완은 독립 후 1946년에 귀국하게 됩니다.

28년간의 망명생활 후의 귀국이었지만 왕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민갑완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영친왕 이은이 독립한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의 반대로
일본에서 귀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자리를 잡기 힘들었습니다. 그 사이 6.25전쟁과 4.19혁명, 5.16 쿠데타를 겪으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1963년 영친왕이 귀국하게 되어 민갑완은 다시 한번 이은은 만나고자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이미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1968년 3월 19일 민갑완은 73세의 나이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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